후지와라노 모토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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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모토쓰네는 9세기 일본의 귀족으로, 주나곤 후지와라노 나가요시의 아들로 태어나 숙부 후지와라노 요시후사의 양자가 되었다. 몬토쿠 천황으로부터 원복을 받고 관직에 진출하여 좌근위중장, 산기 등을 거쳐 공경의 반열에 올랐다. 오텐몬의 변 당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강화했으며, 876년 요제이 천황이 즉위하자 셋쇼에 임명되었다. 이후 태정대신을 거쳐 884년 요제이 천황을 폐위하고 고코 천황을 옹립하며 간파쿠가 되었고, 우다 천황 시기에는 '아코 사건'을 통해 후지와라 씨의 권력을 과시했다. 그는 891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정1위가 추증되고 소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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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6년 출생 - 세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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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모토쓰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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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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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 | 후지와라 북가 |
가문 종류 | 일본 씨족 |
출생 | 836년 |
사망 | 891년 2월 25일 |
아버지 |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
어릴 적 이름 | 데코 (手古) |
별칭 | 호리카와 대신 (堀川大臣), 호리카와 대신 (堀河大臣) |
시호 (한풍) | 쇼센 공 (昭宣公) |
시호 (국풍) | 에치젠 공 (越前公) |
묘소 | 알 수 없음 |
관위 | 종1위, 섭정, 관백, 태정대신 |
증위 | 증 정1위 |
주군 | 몬토쿠 천황 → 세이와 천황 → 요제이 천황 → 고코 천황 → 우다 천황 |
가족 관계 | |
친부 | 후지와라노 나가라 |
친모 | 후지와라노 오토하루 |
양부 |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
형제자매 | 후지와라노 구니쓰네, 후지와라노 도오쓰네, 후지와라노 모토쓰네, 후지와라노 다카쓰네, 후지와라노 아리코, 후지와라노 히로쓰네, 후지와라노 요시코, 후지와라노 다카코, 후지와라노 기요쓰네, 후지와라노 에이코 |
배우자 | 미나모토노 야스히토 친왕의 딸, 소시 여왕 (다다요시 친왕의 딸) |
자녀 | 후지와라노 가슈시, 후지와라노 도키히라, 후지와라노 온시, 후지와라노 나카히라, 후지와라노 가네히라, 후지와라노 다다히라, 후지와라노 요시히라, 후지와라노 온시, 후지와라노 요리코, 후지와라노 가미시, 사다모토 친왕 비,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부인 |
특기 사항 | 스자쿠 천황, 무라카미 천황의 외조부 |
경력 | |
관백 임기 | 880년 ~ 887년, 888년 ~ 890년 |
2. 생애
후지와라노 나가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던 숙부이자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후지와라노 요시후사의 양자가 되었다.[57][49] 양부 요시후사의 뒤를 이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세이와 천황, 요제이 천황, 고코 천황, 우다 천황 등 네 명의 천황 대에 걸쳐 섭정으로서 권력을 행사했다.
모토쓰네는 천황이 성인이 된 후에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위한 새로운 직책인 관백을 창설하였다. 이는 후지와라씨가 천황의 나이나 통치 기간에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정치적 조치였다. 그는 884년에 처음으로 관백 칭호를 받았으며, 887년 우다 천황 즉위 후 내려진 조서를 통해 관백이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의 집권기에는 오텐몬의 변(866년), 간교의 난(878년), 요제이 천황 폐위(884년), 아코 사건(887년) 등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으며, 모토쓰네는 이러한 사건들의 중심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후지와라 가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891년 향년 56세로 사망하였으며, 사후 정1위와 함께 소선공(昭宣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진출
주나곤(中納言) 후지와라노 나가라(藤原長良)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권력자였으나 사내아이가 없었던 숙부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의 눈에 띄어[49] 그의 양자가 되었다.[57] 다만, 타키나미 사다코는 요시후사가 본래 후계자로 생각했던 인물은 동생 후지와라노 요시스케(藤原良相)였으며, 모토쓰네가 후계자 지위를 확립한 것은 오텐몬의 변(応天門の変)으로 요시후사와 요시스케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이후라고 주장한다. 다키나미는 나가라 사후부터 오텐몬의 변까지 요시스케의 아들 후지와라노 쓰네유키(藤原常行)가 모토쓰네보다 일관되게 빠른 승진을 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50].닌주(仁寿) 원년(852년) 동궁(東宮)에서 원복(元服)을 할 때, 몬토쿠 천황(文徳天皇)이 직접 관을 씌워주는(加冠) 각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정6위상(正六位上)에 서임되었다.[57] 같은 해 구란도(蔵人)에 보임되었는데, 이 시기에 요시후사의 양자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순조롭게 관직 경력을 쌓아나갔다. 닌주 4년(854년)에는 좌병위소위(左兵衛少尉)로 옮겼고, 같은 해 종5위하에 서임되며 지쥬(侍従)에 임관했다. 사이코(斉衡) 2년(855년)에는 좌병위사(左兵衛佐)를 겸임하고 다시 구란도(蔵人)에 보임되었다. 덴난(天安) 원년(857년)에는 소납언(少納言)을 겸임했으며, 이듬해인 덴난 2년(858년)에는 좌근위소장(左近衛少将)으로 전임하고 구로도노토(蔵人頭)에 보임되었다. 또한 하리마노스케(播磨介)를 겸임하기도 했다.
조간(貞観) 연간에 들어서도 승진은 계속되었다. 조간 2년(860년) 정5위하, 조간 3년(861년) 종4위하로 승서되었고, 조간 5년(863년)에는 좌근위중장(左近衛中将)으로 전임되었다. 마침내 조간 6년(864년) 1월 16일, 산기(参議)에 임명되어 공경(公卿)의 반열에 올랐으며, 좌근위중장 직은 계속 겸임하였다.
2. 2. 오텐몬의 변 (866년)
866년 (조간 8년), 오텐몬(応天門)에 화재가 발생하자 다이나곤(大納言) 도모노 요시오(伴善男)는 사다이진(左大臣) 미나모토노 마코토(源信)를 방화범으로 무고했다. 이에 우다이진(右大臣) 후지와라노 요시미(藤原良相)는 당시 좌근위중장(左近衛中将)이었던 모토쓰네에게 마코토 체포를 명령했다. 하지만 모토쓰네는 이 명령을 수상하게 여겨 양아버지 후지와라노 요시후사에게 보고했고, 요시후사의 노력 덕분에 마코토는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얼마 후, 도모노 요시오가 진범이라는 밀고가 들어왔고, 결국 그는 체포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오토모 씨(大伴氏)와 기 씨(紀氏) 등 고대부터 이어져 온 여러 명문가 사람들이 대거 처벌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다. 이를 오텐몬의 변(応天門の変)이라고 한다. 같은 해 모토쓰네는 종3위(従三位)에 서임되고 주나곤(中納言)으로 임명되었다.2. 3. 권력 장악
후지와라노 나가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던 숙부이자 권력자였던 후지와라노 요시후사에게 입양되었다. 이후 좌근위중장(左近衛中将)을 거쳐 좌근위대장으로 승진하였고, 무쓰 데와 안찰사를 겸임하였다.모토쓰네는 순조롭게 관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 '''864년''' (조간 6년): 산기에 임명되었다.
- '''866년''' (조간 8년): 중납언이 되었다.
- '''870년''' (조간 12년): 대납언이 되었다.
- '''872년''' (조간 14년): 우대신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872년), 섭정이었던 양부 요시후사가 사망하자, 모토쓰네는 그 뒤를 이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의 친여동생 후지와라노 다카코는 세이와 천황의 뇨고로서 요제이 천황이 되는 사다아키라 친왕(貞明親王)을 낳아, 모토쓰네는 천황의 외삼촌으로서 외척의 지위를 확보했다. 이듬해인 873년(조간 15년)에는 종2위에 서임되었다.
876년(조간 18년), 세이와 천황이 아들 사다아키라 친왕에게 양위하니, 이가 요제이 천황이다. 당시 요제이 천황은 9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외삼촌인 모토쓰네는 양부 요시후사의 선례에 따라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모토쓰네는 어린 천황을 보좌하는 것은 태상 천황의 역할이라며 사양했으나, 세이와 상황의 강력한 의지로 결국 섭정직을 수락했다. 다만, 함께 요구받은 태정대신 취임은 사퇴하였다.
섭정 재임 기간 동안 모토쓰네는 여러 중요한 국정을 처리했다. 878년(간교 2년) 데와국에서 에미시의 후슈(俘囚, 조정에 복속된 에미시)가 반란을 일으키자(간교의 난), 유능한 관리로 알려진 후지와라노 야스노리와 무인 오노노 하루카제 등을 파견하여 이듬해까지 반란을 진압했다. 또한 879년(간교 3년)부터는 약 50년 만에 반전수수법을 다시 시행하였고, 같은 해 스가와라노 고레요시 등과 함께 편찬한 일본몬토쿠천황실록 전 10권을 완성시켰다.
880년(간교 4년) 12월 4일, 세이와 상황이 사망한 당일 모토쓰네는 태정대신에 임명되었다. 요제이 천황은 그에게 계속 섭정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으나[51], 모토쓰네는 이를 강력히 거부하며 여러 차례 사직 의사를 표명하고 자택에 머무르며 정무를 보지 않기도 했다. 이듬해인 881년에는 종1위로 승진하였다.
모토쓰네는 요시후사의 뒤를 이어 네 명의 천황을 모시며 섭정으로서 권력을 행사했다. 나아가 그는 천황이 성인이 된 후에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위한 새로운 직책인 관백을 만들었다. 이는 후지와라 씨족이 천황의 통치 기간에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884년(간교 8년), 모토쓰네는 처음으로 관백의 칭호를 받았다.
연도 (일본 연호) | 주요 경력 및 사건 |
---|---|
864년 (조간 6년) | 산기 임명 |
866년 (조간 8년) | 중납언 임명 |
870년 (조간 12년) | 대납언 임명 |
872년 (조간 14년) | 우대신 임명, 양부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사망 후 실권 장악 |
873년 (조간 15년) | 종2위 서임 |
876년 (조간 18년) | 요제이 천황 즉위, 섭정 임명 |
878년 (간교 2년) | 간교의 난 진압 착수 |
879년 (간교 3년) | 일본몬토쿠천황실록 완성, 반전수수법 실시 시작 |
880년 (간교 4년) | 태정대신 임명 (세이와 상황 사망 당일) |
881년 | 종1위 승진 |
884년 (간교 8년) | 관백 칭호 받음 |
2. 4. 셋쇼 취임과 간교의 난
조간 18년(876년), 세이와 천황은 자신의 아들인 조메이 친왕(요제이 천황)에게 양위하였다. 요제이 천황은 당시 9세로 매우 어렸기 때문에, 외삼촌인 모토쓰네가 양부 후지와라노 요시후사의 선례에 따라 셋쇼에 임명되었다. 모토쓰네는 어린 천황을 보좌하는 것은 상황의 역할이라며 이를 사양했지만, 세이와 상황은 이를 허락하지 않아 셋쇼 직을 맡게 되었다.간교 2년(878년), 데와국에서 에미시의 후슈(일본 조정의 지배를 받던 에미시)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모토쓰네는 능력 있는 관리로 알려진 후지와라노 야스노리와 무인 오노노 하루카제 등을 기용하여 다음 해까지 이를 진압하게 하였다. 이 사건을 간교의 난이라고 부른다.
또한 간교 3년(879년) 이후 몇 년에 걸쳐 약 50년 만에 반전수수법을 다시 시행하였다. 같은 해, 스가와라노 고레요시 등과 함께 편찬 작업을 진행했던 일본몬토쿠천황실록 전 10권을 완성하였다.
2. 5. 태정대신 취임과 요제이 천황과의 갈등
'''880년'''(간교 4년) 12월 4일, 세이와 상황이 사망한 당일 모토쓰네는 태정대신에 임명되었다. 요제이 천황은 모토쓰네에게 계속 섭정의 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일부 기록에는 이때 모토쓰네가 섭정에서 관백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정사인 『일본삼대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에도 시대 이후 편찬된 사서에서는 이를 채택하지 않는 등 논란이 있다.[51] 모토쓰네는 태정대신 취임을 강하게 거부하며 네 차례나 사퇴 의사를 밝혔고, 이 기간 동안 자택에 머물러 정무가 지체되기도 했다.'''881년'''(간교 5년) 1월 15일, 모토쓰네는 종1위로 승서되었다.
'''882년'''(간교 6년), 요제이 천황이 원복을 치렀으나 이 무렵부터 모토쓰네와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모토쓰네는 섭정 사임을 청했지만 허락받지 못했다. 이는 당시 기록에 자주 보이는 의례적인 사퇴가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가 담긴 행동으로 해석되기도 한다.[52][59] 이후 모토쓰네는 사임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정 출사를 중단하고 1년 반 동안 자택인 호리카와인(堀河院)에 머물렀다. 하지만 세이와 천황의 양위 조서에 '어린 군주가 아직 만기를 친정하지 못하는 동안' 섭정에 임명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으므로, 원복을 계기로 친정을 준비하며 사표를 제출하고 천황의 판단을 기다린 것은 당연한 절차이며 의례적인 사퇴 범위 내였다는 반론도 있다.[53][60]
모토쓰네와 그의 여동생인 황태후 후지와라노 다카코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다카코가 아리하라노 분코(세이와 천황의 후궁)를 중용하는 등 모토쓰네를 경시하는 행동들이 결국 모토쓰네가 외척 관계를 포기하고서라도 다카코와 그녀의 아들 요제이 천황을 배제하게 만들었다는 견해가 있다.[54][61] 그러나 아리하라노 분코를 후궁으로 삼은 것은 세이와 천황 자신이었고, 세이와 천황은 다카코 외에도 여러 여성을 입궁시켜 많은 황자를 두었다. 모토쓰네 역시 자신의 딸들(후지와라노 요리코, 후지와라노 카슈시)을 입궁시켜 외손 탄생을 바랐기에 이것이 다카코의 반발을 샀을 수도 있다는 시각도 있다. 또한 당시 섭관 정치 성립기의 불안정한 권력 관계 속에서, 세이와 상황 사후 다카코가 천황의 후견인으로서 독자적인 권력 행사를 시도하면서 모토쓰네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했기 때문에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분석도 있다.[55][62]
'''883년'''(간교 7년) 11월, 궁중에서 천황의 유모였던 기노 젠시의 아들 미나모토노 마스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살인인지 사고사인지, 범인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하게 처리되었으나, 궁중에서는 요제이 천황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사건 직후, 말을 좋아했던 요제이 천황이 궁궐 안에 마구간을 만들고 낮은 신분의 사람들에게 말을 돌보게 한 사실이 드러났다. 모토쓰네는 궁중에 들어가 천황의 측근과 말들을 내쫓았다. 이후 기록에는 요제이 천황이 폭군으로 묘사되는데, 개구리나 뱀을 잡거나 개와 원숭이를 싸우게 하며 놀고, 사람을 나무에 오르게 한 뒤 떨어뜨려 죽였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884년'''(간교 8년), 모토쓰네는 요제이 천황의 폐위를 결심했다. 처음에는 닌묘 천황 때 폐위된 태자 토키사다 친왕에게 의사를 타진했으나, 이미 출가한 친왕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닌묘 천황의 셋째 아들이자 겸허하고 관대한 성품으로 알려진 토키야스 친왕을 새로운 천황으로 결정했다. 토키야스 친왕의 어머니 후지와라노 사와코는 모토쓰네의 어머니 오토하루(乙春)와 자매지간으로, 모토쓰네와 토키야스 친왕은 사촌 관계였다. 모토쓰네는 공경들을 모아 천황 폐위와 토키야스 친왕 추대를 논의했다. 이때 좌대신 미나모토노 토오루(사가 천황의 아들)가 자신에게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모토쓰네는 신적강하하여 성을 받은 자가 천황이 된 선례가 없다고 반박했다. 이어 참의 후지와라노 모로카즈가 모토쓰네를 따르지 않는 자는 베어버리겠다고 위협하자 논의는 모토쓰네의 뜻대로 결정되었다. 모토쓰네에게는 자신의 딸과 세이와 천황 사이의 아들인 사다토키 친왕 등 외척 관계의 다른 황자들도 있었지만, 어린 군주 대신 고령의 친왕을 선택했다. 이는 어린 군주를 옹립할 경우 요제이가 태상천황으로서 실권을 행사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공경 회의의 결정에 따라 모토쓰네는 요제이 천황에게 퇴위를 강요했고, 고립된 어린 천황은 저항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같은 해 2월 4일, 토키야스 친왕이 55세의 나이로 즉위하니 이가 고코 천황이다.
2. 6. 간파쿠 취임과 아코 사건
모토쓰네는 도키야스 친왕을 천황으로 옹립하여 고코 천황으로 즉위시켰다. 고코 천황은 이에 보답하기 위해 태정대신 모토쓰네에게 국정 운영의 실권을 위임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는 사실상 간파쿠의 시작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55세였던 고코 천황은 후계자 문제 역시 모토쓰네에게 맡기려 했으며, 즉위 후 자신의 황자 및 황녀 26명 전원을 신적강하시켜 겐지 성씨를 하사함으로써 자신의 직계 후손에게는 황위를 물려줄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했다. 이는 모토쓰네가 자신의 여동생이자 요제이 천황의 어머니인 후지와라노 다카코의 아들, 즉 조카인 조호 친왕을 후계자로 원할 것이라 예상한 천황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닌나 3년(887년) 고코 천황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모토쓰네는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여동생 다카코의 아들인 조호 친왕 대신, 천황의 일곱 번째 아들인 미나모토노 사다미를 황위 계승자로 추천했다. 사다미는 고코 천황 즉위 이전부터 쇼지(尚侍)를 지낸 모토쓰네의 여동생 후지와라노 요시코에게 양육되었으며, 후지와라 가문과도 연관이 있었다. 고코 천황은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추천에 기뻐하며 모토쓰네의 손을 잡았다고 한다. 신적강하된 자가 즉위한 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천황은 임종 직전 사다미를 친왕으로 복위시키고 황태자로 삼았으며, 같은 날 붕어했다. 사다미는 즉시 우다 천황으로 즉위했다.
우다 천황은 선대 천황의 뜻에 따라 모토쓰네에게 정무를 위임하기로 하고, 사다이벤 다치바나노 히로미에게 조서 작성을 명했다. 이 조서에는 "만기는 모두 태정대신에게 '''관백'''(関白)하고, 거기에 주를 내릴 것(万機はすべて太政大臣に関白し、しかるのにち奏下すべし)"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이는 '간파쿠'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사례이다. 모토쓰네는 의례적으로 사양했지만, 천황은 거듭 히로미에게 조서를 작성하게 하여 "마땅히 '''아코'''(阿衡)의 임을 맡겨서 경의 임으로 할 것(宜しく阿衡の任を以て、卿の任となすべし)"이라는 조서를 내렸다. '아코'는 중국 고사에 등장하는 직위였으나, 문장박사 후지와라노 사세가 "아코에게는 자리가 높아도 직장은 없다(阿衡には位貴しも、職掌なし)"라고 모토쓰네에게 알리자, 모토쓰네는 이를 이유로 정무를 보이콧했다.
이 문제는 반년 넘게 장기화되어 정무가 정체되었고, 곤란해진 우다 천황이 진의를 전하며 위로했지만 모토쓰네는 납득하지 않았다. 아코의 직무에 관해 학자들에게 검토하게 하자, 히로미는 모토쓰네의 괜한 트집이라고 항변했지만 학자들은 모토쓰네의 비위를 맞출 뿐이었다. 결국 히로미를 파면하고 천황이 직접 실수를 인정하는 조서를 내리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이를 아코 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후지와라씨의 권력이 천황보다 강하다는 것이 다시 한번 세상에 알려졌다. 이를 이른바 '정식 간파쿠 취임'이라고도 한다. 모토쓰네는 여전히 히로미를 유배죄로 처벌할 것을 요청했지만, 스가하라노 미치자네가 서신을 보내 만류했다. 이 사건은 천황에게 있어 굴욕적인 것이었기에 모토쓰네 사후에 스가하라노 미치자네를 중용하였다.
아코 사건 이후 우다 천황과 모토쓰네의 관계는 일단 수복되었고, 모토쓰네는 다시 정무를 맡았다. 닌나 4년(888년), 딸 후지와라노 온시가 뇨고(女御)로 입궁했다.
간표 3년(891년), 모토쓰네는 병으로 향년 56세에 사망했다. 사후 정1위가 증여되었고 '소선공(昭宣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한 간파쿠 지위는 모토쓰네가 죽고 나서도 존치되었다.
2. 7. 말년
고코 천황은 생전에 모토쓰네와 우다 천황의 손을 잡게 하고, 우다를 모토쓰네의 아들처럼 보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887년 11월 21일, 우다 천황은 선례에 따라 정무를 모토쓰네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하고, 좌대변 다치바나노 히로미에게 조서 작성을 명했다. 이 조서에는 "모든 정무는 태정대신에게 '''관백'''하고, 그 후에 천황에게 보고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었으며, 이를 통해 관백이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우다 천황은 모토쓰네의 여동생인 스쿠시(淑子)를 종1위로 승격시켰다.모토쓰네는 형식적으로 사양의 뜻을 표했으나, 천황은 다시 히로미에게 조서를 작성하게 하여 "마땅히 '''아코'''(阿衡)의 임무를 맡아 경의 직책으로 삼으라"고 명했다. '아코'는 중국 고사에서 유래한 직위였으나, 문장박사 후지와라노 사요가 모토쓰네에게 "아코는 지위는 높지만 실질적인 직무는 없는 자리"라고 조언하자, 모토쓰네는 이를 빌미로 정무 참여를 거부하는 이른바 아코 사건을 일으켰다.
이에 곤란해진 우다 천황은 모토쓰네를 달래려 했지만, 모토쓰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코의 직무에 대해 학자들에게 검토하게 하고, 히로미는 이것이 트집이라고 항변했으나, 우다 천황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아코'라는 표현이 담긴 조서는 자신의 본뜻과 다른 오류였다며 수정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히로미의 책임 문제가 불거져 공경들이 히로미를 배척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우다 천황은 관계 개선을 위해 모토쓰네의 딸 후지와라노 온시를 여어(女御)로 삼고, 모토쓰네에게 히로미를 처벌하지 말 것을 설득하여 888년 10월에 이르러 화해가 성립되었다. 아코 사건은 모토쓰네가 천황에게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려 했거나, 혹은 자신의 딸이 우다 천황의 두 황자를 낳았던 히로미를 실각시키려 했다는 해석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모토쓰네가 자신의 지위와 권한을 명확히 하려 했던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890년 겨울 무렵 병상에 누웠으며, 그의 쾌유를 기원하며 10월 30일에는 대사(大赦)가 행해지고 천황으로부터 승려 30명을 하사받았다. 모토쓰네는 이를 사양하려 했으나 천황은 거듭 받도록 명했다. 그는 890년 12월 14일에 관백 직에서 은퇴했으며, 891년 1월 13일(간표 3년) 향년 56세로 사망했다. 사후 정1위가 추증되었고, 에치젠국에 봉해졌으며 소선공(昭宣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평가 및 영향
후지와라노 요시후사의 양자로서 그의 뒤를 이어 섭정의 지위에 오른 모토쓰네는 셋칸 정치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네 명의 천황을 섬기며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특히 천황이 성인이 된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초의 관백 직책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이는 후지와라씨가 천황의 친정(親政) 여부와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조치였다.
모토쓰네의 정치적 영향력은 아코 사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다 천황이 즉위 초 모토쓰네에게 정무를 위임하며 내린 조서에 사용된 '아코(阿衡)'라는 직책의 해석을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하자, 모토쓰네는 정무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했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용어 해석의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천황 아래에서 자신의 지위와 권한을 재확인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모토쓰네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우다 천황은 조서를 수정하고 관련자를 문책하지 않는 선에서 모토쓰네와 타협해야 했다. 이는 당시 모토쓰네의 강력한 정치적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모토쓰네는 소위 '폭군'으로 지목된 요제이 천황을 폐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로 인해 후대의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전한 시대에 창읍왕 유하를 폐위시킨 곽광에 비견되는 '공신'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무라카미 미나모토씨 출신의 기타바타케 치카후사는 그의 저서 《신황정통기》에서 요제이 천황 폐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모토쓰네의 자손들이 대대로 셋칸(섭정 및 관백)의 지위를 독점한 것을 그의 공적에 대한 보답, 즉 '적선의 여경(積善の余慶)'이라고 기술했다.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모토쓰네를 중시조로 하는 후지와라 홋케(藤原北家)와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무라카미 미나모토씨(村上源氏)는 이후 오랫동안 조정의 주류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의 사후에는 정1위가 추증되고 에치젠국에 봉해졌으며, '소선공(昭宣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편, 근대 문학 작품 속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소설 《지옥변》의 서두에 등장하는 권력자 '호리카와의 오오도노사마(堀川の大殿様)'는 모토쓰네를 모델로 한 인물로 추정된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생몰년 및 비고 |
---|---|---|
부인 | 히토야스 친왕(人康親王)의 딸 | 닌묘 천황의 황자 사네야스 친왕(히토야스 친왕)의 딸 |
장남 | 후지와라노 토키히라(藤原時平) | 871년 ~ 909년. 좌대신.[6] |
차남 | 후지와라노 나카히라(藤原仲平) | 875년 ~ 945년. 좌대신.[7] |
사남 | 후지와라노 타다히라(藤原忠平) | 880년 ~ 949년. 태정대신, 섭정.[8] |
오남 | 후지와라노 요시히라(藤原良平) | |
딸 | 후지와라노 온시(藤原穏子) | 885년 ~ 954년. 다이고 천황(醍醐天皇)의 중궁(中宮).[1] 스자쿠 천황(朱雀天皇)과 무라카미 천황(村上天皇)의 생모. |
부인 | 소시 여왕(操子女王) | 사가 천황의 황자 타다요시 친왕(忠良親王) (시키부교)의 딸 |
삼남 | 후지와라노 가네히라(藤原兼平) | 875년 ~ 935년. 궁내경(宮内卿). |
딸 | 후지와라노 온시(藤原温子) | 872년 ~ 907년. 우다 천황(宇多天皇)의 중궁(中宮).[1] |
부인 | (불명) | |
딸 | 후지와라노 요리코(藤原頼子) | ? ~ 936년. 세이와 천황(清和天皇)의 뇨고(女御). |
딸 | 후지와라노 가즈코(藤原佳珠子) | 856년 ~ ?. 세이와 천황의 뇨고. |
딸 | 후지와라노 가미코(藤原佳美子) | ? ~ 898년. 고코 천황(光孝天皇)의 뇨고. |
딸 | 사다모토 친왕(貞元親王)의 비 | 세이와 천황의 황자 사다모토 친왕의 비. 미나모토노 가네타다(源兼忠)의 모친. |
딸 | 미나모토노 요시아리(源能有)의 아내 | 몬토쿠 천황의 황자 미나모토노 요시아리의 아내. |
딸 | 미나모토노 요시유키의 아내 |
5. 등장 작품
- '''텔레비전 드라마'''
- * 무용 홀 지옥변 (1962년, 출연: 야나기 에이지로) - 등장하는 "호리카와의 대전님"은 모토쓰네로 추정된다.
- '''라디오 드라마'''
- * 다실 극장 지옥변 (1959년, 출연: 미시마 마사오) - 등장하는 "호리카와의 대전님"은 모토쓰네로 추정된다.
- '''만화'''
- * 초역・이세 이야기 달도 아라누 (2012년 ~ 2013년)
- * 응천의 문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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